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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국가의 길, 리콴유 저 (회고록 2부) 내용 요약
  열린유학원   2020-02-09 (일) 오후 05:00


 
부패와 빈곤, 불법과 편법이 난무하던 땅 싱가포르를 부동의 '일류국가'로 일구어 온 장본인으로 평가받는 한편,

최장기 지도자로서 국제 인사로서 만만찮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리콴유 총리의 회고록의 내용입니다.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 From Third World to First’은 전 싱가포르 수상 리콴유 자서선 2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전편이라고 할 수 있는 ‘리콴유 자서전, The Singapore Story’은 리콴유라는 한 개인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싱가포르의 총리가 되어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탈퇴하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는데,

그 이후의 이야기가 바로 이 책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 From Third World to First’에 담겨있습니다.
 




 
◆ 내가 옥슬리 가의 우리 집으로 되돌아왔을 때
 
구르카 경찰관 (영국이 네팔에서 모집했다)들이 보초병으로 배치되었다.

만약 중국 경찰관이 말레이인을 쏘거나 혹은 말레이 경찰들이 중국인을 쏘는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사회적 반향이 꽤 커지게 될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규율이 잘 잡혀 있고, 충성심이 높다고 평판이 나 있던 구르카 족은 중립적인 입장을 보여 주고 있었다.
 
 
◆ 이것은 가능한 한 가장 짧은 시간 동안 가장 최대한의 수를 동원해 낸다는 이스라엘식 훈련에 기반을 둔 야심찬 계획이었다.
 
중국인 부모라면 누구나 “훌륭한 젊은이는 군인이 되지 않고, 좋은 강철은 못이 되지 않는다.”는 속담을 알고 있다.

부모들이 그들의 아들과 딸들을 통해 군대와 경찰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중등학교에 국가학도 군사훈련단과 국가 학도 경찰 훈련단을 만들었다. …
 
켕쉬가 비감한 어조로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스파르타 식으로 삶을 영위하는 방식은 상업이 위주가 된 사회 안에서는 결코 자연스럽게 생겨나지 않는다.”

나는 국민들이 자신의 태도를 바꾸도록 만들어야 했다. 또한 우리의 젊은이들을 여러 스포츠와 갖가지 육체 활동에 참여시켜서 그들의 신체적인 조건을 향상시키고,

위험하긴 해도 열정적이며, 피가 끓는 여러 가지 활동과 모험에 대한 흥미를 끌어 올릴 수 있도록 해야 했다.
 
 
◆ 나는 영국과 영연방 군대가 싱가포르에 있는 동안에는
 
말레이시아가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존재는 방위 조약이 체결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조차 전쟁 억제력이 되어 줄 것이다.





 
 
◆ 엘라자리가 지휘하는 이스라엘군과 싱가포르군의 공동 작업이 궤도에 오르자, 키드론은 우리에게 응분의 외교적 대가를 요구했다.
 
그것은 바로 싱가포르가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을 외교적으로 인정하고, 대사관을 교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문제를 끈질기게 요구했다. …

우리가 만일 그렇게 해버린다면, 팔레스타인 사람이나 아랍인들에 대해 친밀감을 품고 있는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말레이계 이슬람교도들을 화나게 만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 1967년 6월에 아랍과 이스라엘 간에 6일 전쟁이 벌어 졌을 때, 우리는 이스라엘이 패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만일 그들이 패했더라면 우리 싱가포르 군대는 이스라엘 교관들에게 신뢰감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국제연합에서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결의문에 대해 격론이 벌어지고 있을 때,

외무부장관인 자라라트남은 이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켕쉬는 내게 싱가포르 UN대표부가 잘못 대응하면 이스라엘 고문단이 떠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 설사 우리가 아시아, 아프리카의 결의문에 찬성하는 투표를 했다 하더라도 나는 이스라엘의 군사 고문단이 쉽게 떠나 버리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투표에는 기권하는 편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각료들은 내 의견에 동의해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투표를 기권했고, 이스라엘 고문단은 싱가포르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싱가포르 안에 있는 이스라엘 군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우리는 그들을 외교 사절단으로 받아 들였다. 이스라엘은 대사관을 원했다.

우선 1968년 10월에 이스라엘의 무역 대표부 개설을 승인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싱가포르와 말레이 지역의 이스람교도들 역시 이스라엘의 존재에 대해 익숙해지고 난 뒤에,

우리는 이스라엘 무역 대표부를 대사관으로 승격시켰다.

 
◆ 1965년, 우리는 싱가포르 관광진흥청을 설립했으며,
 
홍콩 영화계의 거물이자 쇼브라더스 영화사를 설립한 룬메 쇼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이일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는 영화와 연예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기에 시각과 청각 이미지를 포장해서 상품화하는 일에 대해선 환했으며, 또한 낯선 나라를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

는 인어의 꼬리와 사자가 합쳐진 멀라이언을 로고로 지정했다.


 



 
◆ 제3세계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신 식민주의자적인 착취 이론을 믿었지만, 캥쉬와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는 눈앞에 닥친 생활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 이론이나 교리를 수집할 여유가 없었다. 어쨌든 싱가포르에는 다국적 기업이 착취할 만한 자원이 없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단지 근면한 국민들, 잘 정비된 인프라, 그록 솔직하고 유능한 정부 뿐이었다.
 
우리의 의무는 200만 싱가포르 국민에게 생계 수단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만약 다국적 기업이 우리의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기술과 경영 노하우를 가르쳐 준다면 우린 그들을 끌어들여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 나중에 무역산업부의 차관이 된 개발청장 냠 통도는 켕쉬가 학교 앞을 지나면서 교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아이들을 볼 때마다
 
어떻게 하면 졸업 후에 그들을 취직시킬 수 있을지 생각만 하면 가슴이 무겁다고 말한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고 했다.
 
 
◆ 대부분의 투자가들은 홍콩과 타이완이 중국과 너무나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발길을 싱가포르로 돌렸다.

… 싱가포르를 방문하는 최고 경영자들은 투자를 결정하기 전에 나를 방문하곤 했다.

나는 그들에게 확신을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항에서 그들의 호텔 그리고 내 사무실까지의 도로를 관목과 가로수로 치장하여 깔끔하고, 단정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집무실이 위치한 이스타나 지구로 들어서면 도시 중심부 속에 자리잡은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90 에이커에 이르는 넘실대는 잔디와 삼림들 사이에 안겨 있는 9홀의 골프 코스를 볼 수 있었다.

한마디 말도 할 필요없이, 우리는 그들에게 싱가포르인들이 유능하며, 그들이 곧 필요로 하는 기술들을 배울 수 있도록 단련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임을 알게 했다.





 
◆ 그 결과 1970년대 후반에 정유 산업은 석유 화학 공업으로 확대되었다.
 
하루에 총 120만 배럴의 기름을 정제할 수 있게 된 1990년대에 이르러, 싱가포르는 휴스턴과 로테르담에 이어 세계 3위의 정유 생산 국가가 되었으며,

원유 거래량에 있어서 뉴욕과 런던에 이어 세계 3위에 올랐다.
 



 
◆ 금융계는 취리히에서 시작합니다.
 
취리히 은행이 아침 9시 정각에 문을 열고, 다음엔 프랑크푸르트, 다음엔 런던,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러는 사이에 뉴욕 은행이 문을 엽니다.

따라서 런던은 금융 거래의 중심을 뉴욕으로 넘깁니다.

오후에 뉴욕이 문을 닫을 땐 이미 샌프란시스코로 넘긴 후지요. 샌프란시스코 은행이 오후에 문을 닫으면, 세계는 베일에 덮입니다.

다음 날 스위스 시간으로 오전 9시가 될 때까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그제서야 스위스 은행이 문을 엽니다. 만일 우리가 싱가포르에 금융 센터를 둔다면,

샌프란시스코 은행이 문을 닫기 전에, 싱가포르가 인계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싱가포르 은행이 문을 닫을 때는, 이미 취리히로 넘겨진 다음일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화폐와 은행 업무에서 24시간 전세계 순환 서비스 체제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 초창기인 1968년부터 1985년까지 우리는 아시아 달러시장을 독접하다시피 했다.
 
우리는 비거주 해외 예금자들이 얻는 이자 수입에 대한 세금 원천 징수를 폐지함으로써, 국제 금융 기관을 끌어 들였다.

1990년대에 이르러 싱가포르는 세계의 거대한 금융 센터 중 하나가 되었는데, 런던, 뉴욕, 도쿄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외환 시장을 보유하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래 우리가 거둔 성공으로 인해 인근의 다른 나라들은 앞다퉈 국제 금융 센터를 개발하였고, 어떤 나라에선 우리보다 더 관대한 세금 혜택을 제공하였다.
 
싱가포르 금융센터의 성공요인은 법에 의한 지배와 독립적인 사법부, 안정되고 유능하고 깨끗한 정부이다.

이런 요인들이 건전한 거시 경제 정책을 추구할 수 있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인플레이션을 낮추어 안정된 환율과 함께 강력하고 안정된 싱가포르 달러를 만들어 주었다.
 
 
◆ 투자는 위험한 비즈니스이다.
 
나의 기본적인 목적은 수익을 최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저축한 것의 가치를 보호하고, 투자한 원금에 적당한 수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1985년 이후 14년 동안 GIC (Goverment Investment Corporation)는 국제 투자 기준을 능가했을 뿐만 아니라, 싱가포르의 자산 가치를 잘 보존했다.
 



 
◆ 한번은 1987년 일본 제조 회사의 경영 감독에게 상을 수여한 후, 나는 왜 같은 기계를 사용하는데 우리나라의 근로자들이 일본 근로자들보다 생산성이 떨어지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일본 근로자들은 더 숙련되고, 더 다양한 기술을 훈련받고 있으며, 좀 더 유연하고, 융통성 있으면서도 결근이 적고, 이 직장 저 직장으로 옮겨 다니지도 않는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싱가포르 기술자들과 팀장, 주임은 손을 더럽히는 일은 기피했다. 반면, 일본 기술자나 팀장, 주임들은 자신을 화이트 칼라나 블루 칼라 근로자로 생각하지 않고,

중간 위치인 그레이 칼라 근로자로 생각했다. 그들은 기계 작동이나 수리 보수를 기꺼이 도우면서 근로자들의 문제를 더욱 잘 이해해 주었다.
 



 
◆ 일본 노동자가 건설적인 노사 관계를 완성시킨 방법과 회사를 사랑하는 충성심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조는 회사가 조종하는 인형이 아니라, 회사의 정신을 흡수하고, 자사의 성공을 바라는 존재였다. 일본의 노조는 회사의 생산과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실제적인 방법으로 요구를 한다.
 
점심 시간에 항의 파업과 태업을 하거나 혹은 근무 시간에 완장을 달고 시위를 한다. 노조원들은 회사 경영의 건전성을 참작하는데, 이는 경영자가 노동자의 연금 일부를 지불하는 이유에서다.

이러한 일본의 방법은 노동조합을 조직하는데 있어 아주 뛰어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 나중에 나는 법을 더 개정해서 정부가, 공적인 목적을 위해 땅을 살 때, 1973년 11월 30일 시점의 가격으로 땅값을 지불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나는 공적 자금으로 세워진 인프라(infrastructure)나 경제 발전으로 인한 땅값 상승을 통해 개인 지주가 이익을 누릴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보았다.

점점 부유해져 감에 따라, 우리는 기본 연도를 1986년 1월에서 1992년 1월, 1995년 1월로 시세에 더욱 가깝게 이동시켰다.

 
 


◆ 또 한 가지 처치 곤란한 문제는 의료보험 문제였다.
 
내가 영국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인 1947년, 노동당 정권은 국립 의료 서비스를 실행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그 누구도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거절당해서는 안 된다.”는 그들의 믿음은, 이상적이긴 했지만, 비실용적이라 엄청난 비용 인상을 가져왔다.

영국 국립 의료 서비스는 실패했다.

한편, 미국식의 의료보험 계획은 엄청난 진단 테스트 비용이 보험료에서 지불되었기 때문에 값이 비쌌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무료 의료 서비스라는 이상은 현실적인 인간의 습성과 상충되는 것이며, 특히 싱가포르에서는 더했다.
 
나는 첫 번째 교훈을 국립 보건소와 병원에서 얻었다. 의사들이 무료 항생제를 처방하면, 환자들은 2,3일 동안 알약이나 캡슐을 복용해 보고, 그래도 낫지 않으면 나머지 약을 버렸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개인 의사에게 상담한 뒤 항생제 값을 지불했으며, 그런 과정을 마치고 나서야 회복되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사용자가 공동 지불함으로써 낭비와 손실을 막을 수 있는 완전한 의료 서비스였다. 의료 보조금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긴 했지만, 심한 낭비이자 예산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 영국과 스웨덴의 복지 비용이 계속 증가하는 것을 지켜 보면서,
 
우리는 이런 허약한 시스템은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1970년데 상황을 통해 정부가 가장의 기본적인 의무까지 대신 책임져 주면, 사람들 안에 있는 욕구가 약화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복지 사업은 독립심을 손상시켰다.
 
사람들은 가족들의 안녕을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 동냥이 생활 방식이 되었다. 일한 동기와 생산성이 떨어지다 보니 끊임없이 내리막 길이었다.

너무 많은 세금으로 사람들은 성취욕을 잃어 버렸다. 그들은 자신의 기본적 욕구를 국가에 의존했다.
 
우리는 가장이 부모, 아내 그리고 자식을 비롯한 자기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유교 전통을 강화하는 것이 최상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런 꽉 막힌 정책을 추진하면서 소비 장려금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야당과 서구 언론으로부터 잦은 비난과 공격을 받곤 했다.
 
 
◆ 싱가포르의 아시아계 사회에서는 부모는 자식들이 자기들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아 가길 원한다.
 
거의 모든 싱가포르인들은 이주민들이기 때문에 안전에 대한 욕망이 아주 강한데, 특히 자식들에 대해선 더하다.
 
복지에 의존하는 대신 재산을 소유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에 돈을 쓰고 싶은지를 결정할 수 있는 힘과 책임감을 얻었다.
 
 
◆ 나는 말과 행동으로 "자유는 질서 속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유교주의를 실천했다.
 
동양 사회의 주된 목적은 질서 있는 사회를 이룩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우리 인구의 5퍼센트 정도는 항상 책임감 없고, 무능력한 사람들로 채워져 있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은 주식이든 재산이든 재산은 다 써버린다. 그들은 자기 훈련이 안 되어 있고, 내일을 위한 계획이나 예산을 세우지 못한다. 그들은 미성년처럼 돌보아 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가능한 한 독립적으로 만들어 복지 시설에서 생을 마감하게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들의 아이들이 부모와 같은 무책임한 삶을 반복하지 않도록 구제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기회가 전혀 없는 사람들만이 도움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서양의 태도와 완전히 정반대의 것이다. 서양에선 자유주의자들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라고 사람들을 부추켜서, 복지 비용이 엄청나게 치솟았다.
 
 
◆ 나는 간단한 메모만을 가지고 한 시간에서 두 시간 가량 그날의 주요 사안에 대해 연설하곤 했다. …
 
나는 국립극장에 모인 청중과 TV를 시청하고 있는 청중 모두를 사로잡는 법과 그 들이 내 사고 과정을 따르게 만드는 법을 배웠다.

나는 처음엔 말레이어로 연설을 하고, 다음엔 푸젠어 (훗날에는 만다린어)로, 그리고 마지막으론 내가 자유 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영어로 연설을 했다.
 
나는 내 생각들이 마치 내 마음 속에서 생겨나고 흘러 나오는 것처럼 표현할 때 청중과 더욱 일치될 수 있었다. 만약 원고가 있었다면 똑같은 확신이나 열정을 가지고 메시지를 전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매년 있는 이런 연설은 국민들에게 정부와 함께 일하고, 나라의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동기를 주기 위한 중요한 행사였다.

내가 대중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것은 내 정치 인생 전체를 통해 힘이 되어 주었다.
 

 



◆ 나는 노령화 사회에 귀감이 되고자 72세의 나이에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  1995년에 나와 부총리인 장남이 집을 샀는데, 특혜 시비가 일어 자진해서 정부 당국의 철저한 조사를 받았다.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결정이 내려졌으나, 나는 그 우연의 결과로 얻게 된 100만 싱가포르 달러를 정부에 돌려주었다.

정부가 그 돈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되돌려 주어, 나는 그 돈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기로 결심했다.


◆ 내 적수들은 중상모략을 할 때 나에게 최대의 손해를 입히고자 선거까지 기다렸다가 실행에 옮겼다.
 
만약 내가 고소하지 않았다면, 이런 근거 없는 주장들이 믿어졌을 수도 있다.

서양의 자유주의적 비판자들은 내 명성이 아주 확고한 것이어서 나에 대한 터무니 없는 말이 돌아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내가 보복성의 고소를 하는 것보다는 관대하게 그런 말들을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말에는 강하게 이의를 제기해야만 사람들이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만일 내가 고소하지 않는다면, 그건 내게 뭔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는 증거로 인용될 수도 있다.
 




 
◆ 인종 보수주의 외에 우리가 직면한 다른 문제는 일자리 경쟁에 대한 두려움이다.
 
전문가 수준에서든 그보다 낮은 수준에서든 어디에나 인력 유입에 대한 저항은 있게 마련이다. 싱가포르인들은 외국 인력이 많을수록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현상이 자신의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벌어지길 바라고 있다.

외국 인재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지금껏 이룩한 것들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첫 내각의 열 명의 각료들 중, 싱가포르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었다.

켕쉬와 친체는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났고, 라자는 실론에서 태어났다.
 



 
◆ 영어와 함께 말에이어나 중국어 또는 타밀어 셋 가운데 하나를 사용하는, 즉 한 국가에서 국어로 두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정책 (Bilingualism)은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무거운 짐이 된다.

위에 열거한 세 가지 모국어는 영어와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모국어 하나만을 사용했다면 우리는 지금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영어 하나만을 사용하는 것 역시 우리를 후퇴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영어만을 쓴다면 우리는 세계 속에서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과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잃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는 국민들에게 모국어를 포기하라고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 1959년 6월 시의회 사무실에서 취임 선서를 할 때, 우리는 청렴과 정직을 상징하기 위해 모두 흰색 셔츠와 흰색 바지를 입었다.

국민들은 우리에게 청렴과 정직을 기대했고, 우리는 그들의 기대를 반드시 충족시키겠다고 결심했다.
 
친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노동자 계급임을 강조하기 위해 구겨진 셔츠와 바지를 입고, 버스나 택시 같은 공공 교통 수단을 이용하며, 조합 사무실 뒷방에서 잠을 자고,

중국어 학교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내세웠다.

그들은 내가 냉방 시설이 잘 갖춰진 집무실과 집을 갖고 있고, 커다란 미제 자가용을 타고 다니며, 취미는 골프에 맥주를 즐겨 마신다고 공격했다.

그리고 내가 유복한 집안의 자식으로 케임브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에도 비난을 퍼부었다.
 
나와 함께 일하는 장관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에게는 관직을 그만두더라도 전문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비상시를 위해 여분의 재산을 따로 챙겨 두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아내들이 대부분 우리가 감옥에 갇히거나 직장을 잃게 되더라도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갈 능력이 있는 직업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장관들이 국민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을 때, 모든 공무원들 역시 협동하며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 1957년까지는 나도 매일 20개피 이상의 담배를 피웠다.
 
그런데 3주 간의 시의회 선거 운동이 끝날 무렵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나는 유권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담배에 중독된 나의 습관을 고쳐 나가기로 결심했고, 결국에는 담배를 끊었다. 물론 2주 동안은 매우 고생스러웠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내게 담배 연기 알레르기가 생겼으며, 나는 냉방 시설을 갖춘 내 집무실과 내각의 집무실에 금연을 실시했다.
 
 
◆ 나는 신문 소유주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발행할 수 있다는 그들의 사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의 장관들과는 달리, 언론 소유주와 언론인들은 선거로 선출되지 않는다.

그 회의에서 나의 마지막 말은 “언론의 자유, 뉴스매체의 자유는 싱가포르의 최우선적인 과제와 선출된 정부의 우선적인 목적 다음에 놓여야 한다.”였다.

나는 이에 대한 격앙된 잘문들에 단호하면서도 예의 바른 태도로 답했다.
 
몇 년 후인 1977년 우리는 어떤 개인이나 그가 임명한 대리인이 신문사 지분의 3퍼센트 이상을 소유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고, 관리 지분이라 불리는 새로운 범주의 지분을 만들었다.

장관은 어느 주주이 관리지분을 가질 수 있는지 결정하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는 싱가포르의 네 개의 주요 지역 은행들에게 관리 지분을 주었다.

그들은 그들 기업의 이익 때문에 정치적으로 중립을 유지하고, 안정과 성장을 택할 것이다.
 
나는 한 명의 부유한 언론 재벌이 날마다 유권자들이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서양식 관행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 정부 운영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총리는 유능한 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자신이 훌륭한 연주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바이올린에서 첼로, 프레치 혼, 플루트에 이르는 주요 악기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각 악기로부터 무엇을 이끌어 내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스타일의 요점은 어떤 시기에 제일 중요한 과제를 떠안는 부서 장관직에 최고의 인재를 임명하는데 있다.
 
제일 중요한 분야는 재무부다. 하지만, 독립 했을 무렵에는 국가 방위가 시급한 과제였으므로 국방부에 가장 뛰어난 인물을 임명해야 했다. 그것을 맡은 사람이 고 겡쉬였다.
 
 
◆ 1951년 싱가포르 법조계의 일원이 된 후 나의 첫 사건은 1950년 12월에 있었던 ‘정글 걸’ 이슬람 폭동에서 영국군 상사를 살해한 네 명의 폭도를 변호하는 것이었다.
 
나는 네 명의 폭도를 무죄 방면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싱가포르의 배심원 제도의 현실적 가치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다수결 원칙에 의해 평결을 내리는 7인의 배심원 제도는 무죄 방면을 쉽게 했다.
 
배심원 제도는 인도에서도 실시된 적이 있었지만, 실패해서 폐지되었다. 1959년 총리가 된 나는 곧바로 살인 사건을 제외한 모든 재판에서 배심원 제도를 폐지시켰다.
 
살인을 예외로 한 것은 말레이시아의 법과 보조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1969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 독립한 후 나는 법무부장관인 에디 바커에게 살인사건 재판에서도 배심원 제도를 폐지하는 안건을 국회에 상정하도록 했다.
 
의회 특별위원회 회의에서 싱가포르의 가장 성공한 형사 전담 변호사인 데이비드 마셜은 자신이 맡은 살인 사건의 99퍼센트가 무죄 평결이었다고 주장했다.

내가 그에게 변호를 맡았던 99퍼센트의 피고가 결백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자신의 임무는 그들을 변호하는 것이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수많은 재판을 보아 왔던 스트레이츠 타임즈의 한 법정 출입기자는 미신을 강하게 믿고,

사형과 같은 중형을 내리는 부담감을 회피하려는 아시아 배심원들은 유죄 판결을 내리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특별위원회에 증언했다.
 
그들은 무죄방면을 선호했고, 가벼운 죄목에나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 기자는 살인사건의 배심원 중에 임신한 여자가 있으면 유죄판결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뱃속에 있는 아이가 저주를 받을 거라는 미신 때문이었다. 법률안이 의회를 통과하자 배심원 제도는 폐지되었고, 벽덕스러운 배심원들 때문에 엉뚱한 판결이 나오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다.
 
 
◆ 1981년 국회에서 나는 데반 나이르를 대통령으로 선출할 것을 제안했다.
 
그와 나는 1954년부터 함께 일했기 때문에, 그의 고결함과 도덕적 자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 싱가포르의 가장 뛰어난 의사 일곱 명이 그를 진찰하고 치료했다.

그중 가장 나이 많은 정신과 의사 나굴렌드란 박사는 1985년 3월 23일 올린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이르는 오랜 세월에 걸친 음주로 인해 알코올 중독증에 걸려 있다.

계속적인 폭음, 알코올에 대한 정신적인 의존, 기억력 감퇴, 일시적 환각, 성적 불능, 결혼 생활의 불화 등의 전형적인 증세가 나타나고 있다.”
 
헌법상 대통령은 범죄에 대한 소추를 받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만약 대통령이 음주 운전을 하다가 누군가를 치어 죽이면 대중의 분노를 불어일으킬 것이다.

각료들은 수차례 모임을 가진 후 그가 병원에서 퇴원해 다시 직무를 보기 전에 퇴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지 않으면 의회에서 탄핵소추를 해야 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 1987년 2월, 그 당시 통산부장관이며 국방부 차관이었던 내 아들 룽은 선거구에서 열린 행사에서 군 안에 있는 말레이계 병사에 관한 문제에 대해 발언했다.
 
왜 SAF의 요직에는 말레이계가 전혀 없느냐고 말레이계 주민들이 국회의원들에게 따지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각은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룽은 설명했다. “SAF는 분쟁이 발생했을 때, 병사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개인적 감정이나 종교 사이의 모순 때문에 괴로워하는 복잡한 입장에 몰리지 않기를 바란다.

병사들은 자신이 올바른 목적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점에 있어서 우리는 병사들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자기 편이 올바르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시간이 지나, 싱가포르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된다면, 이러한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언론은 이러한 발언을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를 적대시하는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이에 대한 비판적 논평이 들끊었다.
 
말레이시아의 외무부장관 라이스 야팀과 싱가포르의 외무부장관은 이 문제에 대해 협의를 했다.

말레이시아에서도 군대나 고위 관료들 가운데는 화교의 비율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를 비판할 수 없었다.






 
◆ 싱가포르에 있는 미국 제 7함대의 존재는 중국, 소련과 우리의 관계를 좀더 쉽게 만들어 주었다. 만일 그들이 없었다면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졌을 것이다.

소련은 싱가포르의 외곽에 있는 섬들 중 한 곳에 어선용 석유를 저장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바랐으나, 우리는 싱가포르에 있는 미국 석유 회사에서 석유를 구입하라고 말했다.

제 7함대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그런 답변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 소련에 군사력 사용의 명분만 주지 않으면 그들은 곧 큰 위기에 봉착한다는 내 예언은 적중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있은 직후, 나는 본에서 독일 총리 슈미트를 다시 만났고, 헨리 키신저, 에드워드 히스, 조지 슐츠 등의 지도자들과 자유로운 토론 끝에,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소련을 격퇴시키고,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을 적극 돕기로 합의했다.

 
 



◆ 포드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철수 8일 후에 만난 나에게 "미국은 이제 어디로 가야만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혼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 후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에서 어떤 일이 펼쳐지는지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라고 대답했다.
 

 
◆ 1991년 1월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을 만났는데,
 
당시 미국·영국·프랑스 군대가 이라크를 포위한 '사막의 폭풍 작전'이 위력을 보이며 전쟁은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개인 집무실에서 국가안보 담당 보좌관 스코크로프와 함께 보다 광범위한 아랍과 이스라엘의 상황에 관한 토의를 하며 저녁시간을 보냈다.
 





 
◆ 점심식사 후 단독으로 만난 자리에서 레이건은 중국의 장쩌민 주석에게 '최첨단 무기'로 인해 어려운 시기에 있는 자신을 압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또 자신이 장 주석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납득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레이건은 나와 장 주석이 가까운 사이임을 알고, 그의 메시지로 인한 실망감을 내가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 적어도 마닐라에서는 대부분의 노동자가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아세안 국가들 중에서 필리핀은 가장 성공할 가능성이 많은 나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후 미국에서 부흥 원조를 받은 덕택으로 1950년에서 1960년대까지 필리핀은 아세안에서 가장 개발이 진행된 나라였다.
 
그러나 필리핀에는 사회를 하나로 통합할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사회의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식민지 지배자들인 엘리트들이었고, 그들은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을 다른 세계의 인간으로 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마치 라틴 아메리키의 대농원 ‘아시엔다’를 지배하는 메스티조들과 착취 당하는 노동자와의 관계 같았다.
 
필리핀에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사회가 있었던 것이다.
 
상류 사회의 사람들은 호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지만, 농민들의 생활은 매우 어렵고 궁핍했다.

농부들은 땅이 없어서 사탕수수나 코코넛 농장에서 일하며 최저 임금으로 생활해 가고 있었다.
 
카톨릭 교회가 가족 계획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한 가정은 자녀를 많이 두었고, 그 결과로 빈곤은 더욱더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1992년 11월에 그를 방문했다. 그때 열린 제18회 필리핀 경영자 총회의 연설에서 나는 민주주의가 반드시 발전을 가져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보다도 규율이라고 믿고 있다고 마했다.
 
나와 두 사람만의 자리에서 라모스는, 의회의 다수파가 정부를 조직하는 영국식 의회 정치가 우수하다는 나의 의견에 찬성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반대 의견을 말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강력한 미국식의 권력 분산을 기본으로 하는 정치 운영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필리핀의 수백만 명의 남녀가 교육 수준에 맞지 않는 대우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구하로 해외로 나갔다.

싱가포르에서 일하고 있는 필리핀인들이 많았지만, 사실 그들은 싱가포르인에게 뒤지지 않는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건축이나 예술, 음악 등의 분야에 있어서는 필리핀인들이 싱가포르인들보다 휠씬 창조적이고 예술적이었다.

미국과 가장 다른 점은 필리핀 국민들의 부드럽고 쉽게 관용하는 문화이다. 20년 이상 자국을 혼란으로 몰아 넣었던 마르코스 같은 지도자에게도 필리핀은 국장을 지내 주었다.

이것은 필리핀에서밖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 고위 관료들은 여전히 베트남 개방 후에 찾아올 사회적 병폐와 정치적 권력의 상실을 두려워해 자유화를 늦추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성장이나 시장 등의 지방 관료들이 적어도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였던 데 비해, 베트남 지방 관료층의 다수는 아직 베트남 전쟁의 게릴라 사령관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모스크바의 정권과 소련이 붕괴하는 모습을 두려운 눈으로 목격했다. 그리고 그들은 중국 해안 도시들을 감염시켰던 사회적인 타락이 베트남을 물들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이 힘든 게릴라전을 한 것은 그런 장래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1993년에 나는 키엣에게 게릴라 전사 출신의 관료들을 고문과 같은 지위로 승진시키고, 그 대신에 젊은 세대,

그것도 될 수 있으면 구미 국가에서 조금이라도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실무책임자로 앉혀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들에겐 시장 경제를 이해하고 외국 투자가들을 읽을 줄 아는 관리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전쟁에서 싸웠던 게릴라 출신의 노병들로, 자신들의 방식으로 나라를 건설하고 싶어했다.

만약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다면 베트남의 경제는 더욱 빠르게 발전할 것이다.

베트남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라는 구속을 벗고, 자유롭고 융통성을 지닌 사회가 되기 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 때가 오면 베트남이 크게 비약을 할 수 있으리라는 데에는 아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베트남 전쟁 중에 그들이 소련제 무기를 다루었던 기술이나 빈약한 물자를 활용하여 전투에 임했던 것이나,

조국을 떠난 베트남인들이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단기간 내에 성공한 것을 보아도, 그들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두 사람 사이에 통역자가 배석할 때면 나는 대개 타인의 마음의 미세한 결을 느끼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 통역자의 설명을 기다려야 할 때면, 나는 종종 통역의 말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상대방의 몸짓을 통해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상대방이 영어로 이야기할 때면, 나는 그 말이 비록 문법이나 관례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여도 휠씬 쉽게 그의 사고의 흐름이나 체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말의 마디와 마디 사이의 틈이나 망설임 등이 때로는 그 말 전체의 뉘앙스를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통역자는 이러한 틈이 갖는 효과를 누그러뜨리며, 말을 할 때 상대방의 주저함 속에 숨어 있던 함축적인 뜻을 생략한 채 표면적 의미만을 내게 전달하곤 한다.
 





 
◆ 그는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에 비하면 소련이나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는 소국에 불과합니다.
 
미국에 비하면 싱가포르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는 나의 말에 당신이 불쾌해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동아시아와 태평양을 담당하는 국무부 사무실 밖으로 나가면 싱가포르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라고 썼다.

“미국에서 모든 문제는 3차원적인 것으로서, 행정부와 의회와 언론이 그것입니다. 의회와 언론은 흑백 논리에 따라 단순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신은 공산주의자냐 아니면 친미적인 인물이냐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행정부의 경우에는 매우 다릅니다. 물론 그 안에는 얼간이들도 있지만,

그러나 말 그대로 일류급에 속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 나는 총리 재임 9년 만에 재충전의 필요를 느꼈고, 앞으로의 국제 정치는 미국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되어 하버드 대학의 명예 연구위원으로 초청을 받고,

연수의 기회를 얻어 고명한 교수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 200명의 학생 및 열 명의 연구원들과 함께 묵고 있는 하버드의 엘리엇 하우스에서 나는 미국 문화 연구 과정에 몰두했다.

나는 선생님과 학생 사이의 격의 없는 관계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학생들은 놀라울 만큼 똑똑했다.

한 교수는 그 학생들 중 일부 우수한 그룹과의 논쟁은 때로 자신감을 잃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자백했다.
 




 
◆ 1940년에서 1960년대까지 내가 접한 영국의 지도 교수들은 어수선한 런던과 웨스트민스터에서 멀리 떨어진 그들만의 상아탑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채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반면 미국의 교수들은 정부와 제휴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키워 나갔다. 케네디 행정부 아래에서 많은 교수들은 보스턴을 떠나 뉴욕을 거쳐 워싱턴에 이르는 왕복 열차를 타고 출퇴근 했다.
 
그 당시의 영국 학풍이 지닌 장점은 과거에 대한 엄격한 연구에 있었지, 추측이 섞인 현재나 미래에 대한 연구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버드 경영대학원이 제공한곤 하는 것과 같은 기업 및 산업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하지 않았다.
 
영국인들과 달리 미국인들은 과거에 대한 비평적 연구에 스스로의 연구 영역을 제한하지는 않았다.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현재를 탐구하는 것은 미국의 학자들이 가진 독특한 힘이었다.
 
 
◆ 동아태 담당 국무 차관보의 마셜 그린은 1972년 2월 닉슨의 중국 방문을 의미하는 미국의 대 중국 주도권에 관한 나의 견해를 물었다.
 
나는 깜짝쇼와 같은 요소만 제외한다면 거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대답했다. 만인 그것이 깜짝쇼처럼 진행되지만 않았다면, 보다 더 좋은 결과를 많이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깜짝쇼로 인한 충격은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지도자들에게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반대편으로 바꿀 수 있는 갑작스런 정책을 선호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남겼다.

타이완은 처음부터 우려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미국이 여전히 타이완과의 협정에 적힌 약속들을 준수하리라는 사실은 이제 명백해졌다.

한국도 걱정을 표했지만 지금은 그들과 미국간의 관계가 전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요컨데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정상화는 누구도 대가를 치르지 않은 채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아시아에 있는 모든 나라가 보다 안정을 되찾은 것이다.


 


 
◆ 나는 서방의 문명과 기술을 접하는 기회가 늘어나면서 중국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현재의 폐쇄 정책을 지속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한때 중국 경제가 ‘최소한의 생필품 단계’를 지나가면, 그들도 지금 소련이 겪고 있는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상품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원할 것이며, 그러한 선택권을 가지면 평등주의에 대한 열정을 잃게 될 것이다.
 

◆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비록 실패로 돌아갔다고 해도, 그것은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에게는 시간을 벌어 주는 역할을 했다.
 
1965년 미군이 베트남으로 대거 파병되던 시절, 태국과 말레이시아, 그리고 필리핀은 공산군의 지원에 의해 무장된 내부 게릴라들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고,

공산당 지하 조직은 싱가포르에서도 여전히 활동 중이었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쿠테타가 실패하는 격도의 와중에서,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와 선전 포고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필리핀은 말레이시아 동쪽에 있는 사바를 요구했다. 생활 수준은 형편없었으며, 경제는 저속성장을 하고 있었다.
 
미국은 행동은 동남아시아의 반공 국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집안을 정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975년에 이르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하기에 훨씬 더 나은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만일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공산주의자들과 맞서려는 이들 국가의 의지는 사라졌을 것이고,

동남아시아는 공산주의자들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눈부신 번영을 보이고 있는 아시아의 시장 경제는 베트남전 기간 동안 자라났던 것이다.
 
 
◆ 중국에 있어서 형식은 내용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타이완을 되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타이완이 중국의 일부라는 원칙은 도전 받을 수 없었다.

중국이 미국에게 바라는 것은 ‘중국은 하나’라는 원칙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레이건이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타이완 사람들은 배반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두 개의 목표물이 조화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관리되고 견제될 수 있다.

 



 
◆ 나는 레이건에게 자신은 타이완의 오랜 친구였으므로, 단순히 그들은 잊어버릴 수는 없다는 점을 뻬이징에 설명해야 한다고 권유했다. 레이건은 자기가 중국을 방문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중국에 가는 걸 꺼리고 있고, 만약 가겠다고 결정을 한다면 가는 길에 타이완도 방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나는 그의 타이완 방문을 반대했고, 특히 중국에 가는 길에는 타이완에 가지 말 것을 충고 했다.
 
 
◆ 장쩌민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중국과 타이완 대표가 싱가포르에서 원활한 회담을 갖게 한 데 대해 사의를 표하였다.

1949년의 내전 이래 "비공식적"이긴 했지만, 최초의 중국과 타이완의 회담이 열렸던 것이다.
 




 
◆ 카터 정부에서 인권 문제 담당 차관보를 지낸 패트리샤 데리언이 1978년 1월에 재판 과정 없는 구금 제도를 철폐해 줄 것을 촉구하기 위해 나를 만나러 왔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 법령은 선거 때마다 상대 정당의 비판거리가 되어 왔지만 매번 유권자의 압도적 다수가 표로써 우리와 법령을 지지해 준 사실을 알려 주었다.
 
싱가포르는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 이익을 우선하는 유교주의 사회였다.
 
나의 책임 중 가장 우선 순위는 국민들의 복지이다. 나는 공산주의 파괴 분자들을 상대해야만 했는데, 이들을 공개 법정에서 기소하기 위해 필요한 증인을 확보할 수 없었다.

데리언은 너무나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내가 담배 알레르기가 있다는 얘기를 자신의 대사로부터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담배를 피워도 되는지 물었을 정도였다.

1978년 당시 동석했던 존 홀드리지 대사는 20년이 지난 후에 자신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몇 차례에 걸쳐 자신을 빅토리아 시대의 마지막 사람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는 리콴유는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확고한 유교주의자였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싱가포르의 젊은 세대에 유교적인 미덕을 심어 주고자 했다. 반면 데리언은 미국 남부 시민 운동의 베테랑이다.

시민운동가와 지방 정부 사이에 빈번한 충돌이 있는 그곳에서 미국 헌법에 명시된 ‘인간의 권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인권 운동에 몸을 바쳐 왔다.

두 사람은 2시간이 넘도록 이견을 좁히고자 대화를 나누었지만, 서로의 마음에 다가가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 1978년 10월 내가 카터 미국 대통령과 재회했을 때도, 그는 아시아에 별 관심을 안 보였지만, 보좌진의 설득으로 주한 미군철수 공약을 철회한 사실을 알고 안도했다.
 
 
◆ 자유주의적이며, 반전과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1991년 5월 도쿄에서 열린 한 포럼에 나를 초청해서 유명한 일본과 미국의 석학들과 함께 인권과 민주주의를 주제로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나는 우선 영국과 프랑스가 40여개의 전 영국 식민지와 25개의 전 프랑스 식민지에게 서구식 헌법 체제의 독립을 부여한 지 50년이 흘렀다고 말했다.

불행하게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그 결과가 미미했다. 미국 조차도 50년간의 강점 후에 1945년 해방된 식민지인 필리핀에 성공적인 민주주의의 싹을 틔우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한 민족이 서구식 민주주의 정치 체계를 도입하기 전에, 우선 높은 수준의 교육과 경제 발전에 도달해야 하며,

다수의 중산층을 형성해서 그 구성원들이 더 이상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 투쟁하지 않아도 되게 해야만 한다고 제안했다.

… 나는 서로 상이한 사회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수천 년에 걸쳐 따로 발전해 왔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과 규범은 다를 수 밖에 없음을 역설했다.
 
그러므로 미국과 유럽에서 20세기 말 형성된 인권에 대한 기준이 전 세계에 모두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위성 TV의 발달로 인해 한 정부가 자국민들에게 행하는 잔혹 행위를 은폐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여러 나라들로 구성되는 공동체는 서서히 그러나 불가피하게 내정에 대한 불간섭과 국민을 좀 더 문명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방식으로 대할 것을 주장하는 도덕적 권리 사이에 균형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점점 더 개방되기 때문에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공통적인 세계적 기준이 형성될 것이다.

비인도적이고, 잔인하거나 미개한 방식들은 비난 받게 될 것이다. (인류의 4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 중국, 그리고 인도는 1999년 나토에 의한 세르비아 발포를 비난했다.)
 
 
◆ 자유는 질서 속에만 존재할 수 있다고 나는 강조한 바 있다. 동양 사회의 주된 목적은 질서 있는 사회를 이룩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사실 그 견해는 싱가포르에서 중국어로 교육 받은 자와 영어로 교육 받은 자 사이에 있는 문화적 격차를 발견했던 1950년대 초기의 내 경험에서 비롯됐다.
 
중국적인 가치에 경도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규율이 잡혀 있었고, 예의 바르고 윗사람을 공경했다. 그 결과는 좀 더 질서있는 사회를 만들어 냈다.
 
그런 가치들이 영어 교육으로 인해 희석되었을 때,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활기 없고, 격식이 덜 갖추어진 행동을 했다.

게다가 영어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대개 자신감이 부족했다. 자신의 모국어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 아시아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 서양, 그리고 심지어 일본의 관심은 타이완, 한국, 홍콩이나 싱가포르가 아니라 중국에 대한 우려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미국은 동아시아의 호랑이들이 중국에게 민주적 정치제도로 인해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룬 자유 사회의 본보기로 비치길 원했다.

600만 홍콩 인구의 운명은 미국이나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12억 인구의 운명은 세계의 힘의 균형을 결정할 것이다.
 
미국인들은 홍콩의 장래보다 중국의 장래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칠 홍콩의 민주주의에 대해 중국과 일치된 문제를 안고 있다.

유사한 문제로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우리 300만 국민들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 걱정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중국에 대한 잘못된 본보기를 만들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싱가포르를 비난하고 있었다.
 
 
◆ 만일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영국이 아시아에서의 맹주로 계속 군림했다면 싱가포르와 그 일대 지역은 그렇게 일찍 산업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영국은 자신의 식민지가 산업적으로 앞서가도록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련의 붕괴 이후, 미국인들 예전의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독단적인 전도자처럼 변했다.

그들은 석유 강대국인 아라비아 반도의 국가들처럼 자신들에게 손해가 될 곳을 제외하고서는 어디에서든 민주주의와 인권을 증진시키고자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여전히 모든 강대국들 가운데 가장 친절하고 급부상하는 강대국들보다 덜 강압적임에 틀림 없었다.
 
 
◆ 미국 정치의 진행에 대한 공개 원칙에도 불구하고, 어떤 나라도 미국이 세계의 위기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내가 만일 보스니아나 코소보 사람이라면 미국인들이 발칸에서 자신들의 일에 개입하리라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개입했다.
 
이는 미국의 근본적인 국가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정권에 의해 자국민에게 자행된 인도주의에 어긋난 범죄를 종식시키고 인권을 지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정책이 계속될 수 있을까?

또한 전세계에 적용 될 수 있을까?
 
르완다와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므로 미국인 친구들은 그들의 외교 정책이 종종 전략적인 국가적 이익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그들의 언론 매체의 충동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나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 우리는 독립한 후 1966년 10월에 5,000만 달러를 반은 보상금으로, 반은 차관으로 받아 ‘피의 부채’ 문제를 미흡하게나마 매듭지어야 했다.

나 역시 일본 기업인들의 싱가포르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 사토 총리는 또 최근에 있었던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 공주의 성공적인 싱가포르 방문에 대해 나에게 공식적인 감사의 뜻을 표했다.

나는 그들과 만찬을 즐겼고,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별인 남십자성을 보여 주기 위해 이스타나의 옥상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 모두 영어가 능숙해서 대화가 쉽게 진행되었다.

아내와 나는 이후 몇 차례의 도쿄 방문 때마다 그들의 친절한 호의를 접하가 되었다.
 
 
◆ 총리로서 나의 마지막 임무 중의 하나는 1989년 2월 그의 장례식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 영국의 필립 공과 함께 일본 천황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그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영국과 미국은 1941년 12월 8일 선전 포고 없이 일본에 의해 침략 당했던 두 강국이었다. 모든 강대국과 원조 수혜국들은 대통령이나 총리가 참석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군주가 참석하기도 했다. 세계는 일본의 눈부신 성공에 경의를 표하러 온 것이다.




 
 
◆ 일본 정부는 자국에 대한 경제적 가치에 따라 개발도상국의 중요도를 매기는 경향이 다른 강대국보다 휠씬 심했다. 싱가포르는 천연자원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일본은 우리에 대한 점수를 낮게 매기는 실정이었다.
 
예를 들어 석유 화학 공장에 투자를 해줄 일본인들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는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같은 다른 연안 국가들과 손을 잡고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그들의 선박에게 통행료를 징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줘야 했다.
 
 
◆ 사과를 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들이 한 일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후회나 회한을 표명한다는 것은 단지 현재의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 현재 일본의 태도는 미래 행동에 대한 징조가 된다. 그들이 과거를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 범죄의 협력자로 처형 당한 도조 히데키는 유서에서 일본이 패배한 유일한 이유는 더욱 강한 세력이 자신들을 압도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토의 크기와 인구에 비해 일본은 첨단 병기를 사용하는 미래의 전쟁에서 무시 못할 세력이 될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일본과 중국간의 분쟁이 전통적인 무기의 수준을 넘어선다면 심각한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 석유나 다른 중요한 자원의 공급이 끊겨서 한 나라로서의 생존 수단을 빼앗기거나 수출 시장을 봉쇄 당해 자신들의 나라가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1942년에서 1945년에 걸쳐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다시 잔인하게 싸울 것이다.
 
 
◆ 나는 리펑 중국 총리에게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고, 역사 교과서에 과거의 침략행위에 대한 진실을 왜곡해서 편찬하는 것은,

일본이 군국주의를 부활시킬지도 모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나는 북한이 내부로부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기술, 관리 등에 관한 노하우를 북한에 이전하도록 권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북한은 생활 수준을 높여 남한에 대한 부담을 덜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북한 지도층의 정신적인 자세를 변화시켜야 하며, 두뇌 집단, 대학,

그리고 여론 조성자들 사이의 교류와 같은 좀 더 많은 인적인 납북간 접촉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 나는 덩샤오핑과 김일성 같은 구세대 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던 강한 유대 관계가 장쩌민과 김정일 사이에도 여전히 존재한다고는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구세대 지도자들은 한국 전쟁에서 함께 싸운 전우였다. 현재의 지도자들은 그런 식의 동지애로 뭉쳐진 사람들은 아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과 혼란은 중국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다.
 
중국이 원하는 것은 남한으로부터의 무역과 투자가 계속 될 수 있도록 현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두 한국이 통일 되는 것 역시 중국에게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미국과 남한에 대항할 수 있는 북한이라는 협상 카드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 지 6주가 지난 후에
 
우리는 홍콩의 2만 5천 가구에게 필요가 생길 때까지 싱가포르로 이주하지 않아도 되는 영주 원칙 허가를 제공할 것을 발표했다.

AIP는 5년 동안 유효할 것이고, 그 후에도 5년 더 연장될 수 있었다. … 신청서를 얻기 위해 홍콩의 싱가포르 대사관 밖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은 거의 폭동을 일으킬 정도였다.

… 그러나 1997년까지 단지 8,500명만이 싱가포르로 이주했다.
 
 
◆ 덩샤오핑의 표정과 몸짓은 경악스런 심정을 드러냈다.
 
그는 내가 진실을 토로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그는 별안간 질문을 던졌다. 나는 깜짝 놀랐다.

실상이 제시되었을 때 미리 준비됐던 방향에서 벗어난 언동을 기꺼이 하는 공산주의 지도자를 나는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1949년 중국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중국어 교육을 받은 싱가포르의 중국계 주민들 사이에서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압제하에서 당해 왔던 굴욕을 씻어 줄 강대한 중국이 출현하는 데 대한 기대로 열렬한 민족주의적인 자긍심이 높아져 갔다.
 
한편, 말레이인이나 인도인들, 그리고 영어 교육을 받은 중국계 주민들과 국민당을 지지하는 소수파 중국계 주민들 사이에서는 강한 불안감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1949년 영국 식민지 당국에 의해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활동이 모두 금지되었으나, 두 세력간의 균열은 싱가포르 사회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 말레이시아는 1974년 5월에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나는 싱가포르도 중국과 공식적인 접촉을 시작해야 할 시기라고 판단하고 1975년 3월에 라자라트남 외교부장관의 베이징 방문을 승인했다.
 
 
◆ 나는 중국을 가능한 한 두루 살펴보기 위해 장기 방문을 요청했고, 중국측은 방문을 1976년 5월 10일부터 23일까지 결정했다.
 
동포로서의 방문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우리는 열일곱 명의 사절단 가운데 타밀인인 라쟈라트남과 말레이인 아마드 마타르 정무부차관을 포함시켜, 영어로 진행될 모든 회의에 참가시키기로 결정했다.
 
 
◆ 종이 깃발과 꽃을 든 수백 명의 여학생들은 마지막까지 깡충깡충 뛰며 안녕을 외쳤다. 나는 어떻게 이러한 전시 행위를 위해 학생들이 수업을 빠지게 만들까 의아하기만 했다.

아이들이 입은 화려한 색의 점퍼나 스웨터는 특별한 행사에만 입혀지고, 행사가 끝나면 조심스레 회수되었다.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우리가 던진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했다. 베이징 대학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졸업 후의 진로에 관해 물어 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인민에게 가장 충실하게 봉사할 수 있다고 당이 결정하는 대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상당한 학식을 갖춘 학생들로부터 앵무새처럼 똑같은 대답을 들을 때마다 나는 다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대답은 정치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 중국은 실로 이상한 곳이었다. 나는 중국에 관한 책, 특히 닉슨 대통령이 방문한 후의 중국 상황을 다룬 책을 많이 읽었다.

밀밭과 논 한 가운데에 세워진 거대한 플래카드와 벽에 쓰여 지거나 칠해진 섬뜩한 혁명 구호를 보면 어이가 없었다.
 
정말이지 초현실적인 경험이었다. 철도역이나 공원에 틀어 놓은 확성기나 라디오로부터 흘러나오는 슬로건을 듣고 있자면 사고가 마비되어 버렸다.
 
우리에게 꾸민 듯한 열정으로 문화 혁명을 찬양하는 말을 늘어 놓을 때를 제외하고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이러한 열기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마치 전시용 세트 같은 모습이었다.
 
 
◆ 내가 중국을 방문하기 전까지, 싱가포르 정부는 30세 이하의 국민에게는 중국 방문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나는 귀국 후, 이러한 방침을 제고하도록 지시했다.
 
내 자신의 경험이나 딸애의 감상을 통해 본다면, 위대한 조국에 대한 낭만적인 동경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들을 중국으로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중국에 머무는 기간은 길면 길수록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중국 방문의 나이 제한 조항을 철폐했다.
 
 
◆ 그들이 환영하는 뜻에서 박수를 쳤을 때 나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중국식 박수로 답하지 않았다. 박수에 박수로 답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싱가포르 인이며 그들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덕분에 창피한 일도 겪었다. 공장이나 전시회를 방문할 때면 중국의 관습대로 붓과 벼루, 그리고 먹을 내놓으며 한지로 된 공책에 감상을 적어 달라고 부탁을 받곤 했다.

중국식 붓을 쥐어 본 일은 초등학교 때 몇 달에 불과했으므로 나는 펜을 달라고 부탁해 영어로 감상을 적어야 했다.
 
자신이 중국인답지 못하다는 느낌은 그들을 더 많이 알게 되어 더 이상 언어나 행동, 그리고 복식의 차이에 구애받지 않게 되면서 점점 엷어져 갔다.

그렇지만 그때 첫 방문에서는 중국인들과 그들의 행동이 낯설기만 했다.
 
남부 중국에서는 생김새가 같기 때문에 그들 중 하나로 보일 수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 1950년대에 혁명에 공헌하기 위해 중국으로 간 젊은 싱가포르 학생들은 중국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중국 사회로부터 격리된 유약한 화교일 뿐이었다.

서글픈 일이다.

동포애의 감정은 해외에 사는 친척들이 가끔 선물 같은 걸 가지고 찾아오거나 할 경우에나 근사한 것이다.
 
 
◆ 우리는 중국 남부에 사는 사람들과 외모상으로는 같다. 우리는 남녀관계에 대한 태도, 가족 안에서의 인간 관계, 어른에 대한 공경 등 가족과 친구에 관한 사회적 규범에서 같은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야나 세계관, 그리고 세계 속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한 관점은 너무나 다르다. 그들 나라는 너무 크기 때문에 그들은 노력만 하면 정상에 오르는 건 시간 문제라고 하는 자신감에 차 있다.

뿌리를 잘라내고 전혀 다른 토양과 기후에 다시 뿌리를 내린 우리 이주민들은 그러한 자신감이 결여 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지며,

불확실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과연 우리에게 닥쳐올 미래가 무엇일지 언제나 고민하고 있다.

 
◆ 그는 (덩샤오핑) 내가 만난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5척의 단신이지만 그들 중 가장 큰 거인이었다. 7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불쾌한 진실에 직면하자 그는 기꺼이 마음을 바꾸었다.

만찬 도중에, 나는 그에게 흡연을 권유하였다. 부인을 가르키며, 그는 의사가 그녀에게 그가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그는 담배를 줄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는 내가 담배 연기 알레르기 증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58년 만에 싱가포르에 와서 기뻤다고 했다. 싱가포르는 극적으로 변했다고 그는 나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나는 싱가포르는 인구 250만의 소국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만일 상하이만을 갖고 있었다면 나 역시 상하이를 싱가포르처럼 빨리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중국 전체를 가지고 있지요.”라고 말했다.
 
 
◆ 회담을 마치고 우리는 곰 발바닥 요리 熊掌(웅장)이 마련된 오찬장으로 갔다.

곰 발바닥을 진한 소스에 살짝 튀긴 이 요리는 인민대회당에서 여태껏 먹어 본 것 중에서 최고의 진미였다. 요리사는 덩의 손님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 재통일에 대한 장애물은 많지만 “가장 큰 장애물”은 미국이었다. 지난 번에 만났을 때 타이완을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으로서 사용하고 있다는 말을 또 한번 되풀이 했다.
 
… 덩 샤오핑은 저 세상에가 칼 마르크스를 만나기 전에 타이완과의 재통일을 보게 되기를 깊이 원하고 있다고 나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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